작성일 : 13-09-07 13:45
[광복전] 걸출한 조기 공산주의 자 리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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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별의시인
 조회 : 9,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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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휘는 1873 년12월3일 조선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서울에 상경해서는 륙군무관학교에 입학,우수한 성적으로 륙군참령(參領,소좌)으로 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특히 충성심이 강하고 청렴강직하여 고종의 칭찬과 함께 1902년에는 강화도진위대 대장으로 승진되였다.
강화군 진위대장시절의 제복입은 모습(앞줄 중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진위대장에서 사임하고 교육활동에 전념 하였다.훗날 리종호의 ‘보성학교’,리준의 ‘보광학교’와 함께 한국근대교육의 삼보 (三寶)라 불리게 되는 ‘보창학교’전신인 ‘육영학교’를 설립한다.후에 ‘육영학교’는 영친 왕의 지시에 따라 ‘보창학교’로 바뀌며 보창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리동휘는 기독 교를 받아들여 ‘강화의 바울’이라고도 불리워졌다.
1907년7월 일제의 강박으로 <군대해산령>이 반포되자 강화도주민들이 봉기하자 그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여 일제에 체포되였다가 4개월후에 석방되였다.
1907년에는 량기탁,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 다.그는 <한북진학회(漢北進學會)>를 건립하고 1908년1월에는 서우학회 (西友學會) 련합 하여 <서북학회>를 건립하였다.
리동휘는 대단한 연설가였다.그는 도처에서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켜 세우려면 예수 를 믿으라!예배당을 세우라!학교를 세우라!자녀들을 교육시켜라!단발하라!>면서 눈물의 호소를 드렸다.그는 카나다선교사 구례선의 보호를 받아 해금이 되여 함경남도 성진으로 옮겨가 <1교1당>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초 리동휘는 전도의 명의로 씨비리와 연변을 순회하였다. 씨비리에서는 한북 진학회시기에 반일문화계몽운동을 함께 한 리종호(李鐘浩)를 만나 반일문화운동에 대 하여 토의하였으며 연변에서는 간민교육회를 창립한 리동춘,윤해,박찬익,김립등을 만났 다.
그때 김립,윤해가 국자가의 소영자에 독립운동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듣자 리동휘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리동휘의 제의하에 학교이름도 <길동기독학당>이라고 지었다.1911년3월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였으며 초대 교장 에는 리동춘을 추대하였다.비록 리동휘는 학교설립되기전에 조선국내로 돌아갔으나 구춘선, 계봉우, 오영선등 수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길동학당으로,기택진,홍우만과 자기 딸 리희순을 명동학교 교사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1911년초 리동휘는 일제가 조작한 <신민회105인사건>으로 체포되여 판결을 받고 인천 대무이도(大無夷島)에 류배되였다.2년동안의 류배살이에서 풀려나 성진으로 돌아 온 그는 또다시 구례선선교사의 조수가 되여 기독교전도사업에 뛰여들었다.
1912년 가을 그는 갑산군 혜산진교회에서 개최한 <부흥도사경회>에 참가한 기회를 빌어 일제의 감시를 교묘히 피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왔으며 곧 명동에서 오영선,기택진,홍우만,그리고 자기 딸 희순과 상봉하였다.
그후 리동휘는 길동학당에서 김약연,김립,장기영,박찬익등과 함께 당시 북경 원세개 정부에서 <련성자치>를 공포한 기회를 빌어 부도통인 려원홍에게 간민교육회의 기초위에서 <간민자치회>를 비준할테 대하여 신청하였다.그들의 노력끝에 끝내 <간민 회>가 설립되였다.
1913년 리동휘는 로씨야에 들어가 리상설,홍범도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에 활동 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폭발되자 로씨야와 연변에 있는 반일지사들과 함께 반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고 리상설을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동년 4월 무장투쟁을 위한 인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리종호,김립등과 같이 왕청라자구 삼도하자에 있는 태흥학교를 기초로, 길동학당의 교직원들을 주축으로 연변과 기타 지방에서 모여온 청년들을 모집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때 학교 교장으로는 리동휘,교원으로는 김립, 장기영, 남공선, 김영학, 김광운, 오영 선,홍우만,김하정 등이였다.
1916년 라자구에 사관학교가 설립되였다는 소식을 탐지한 일제는 중국 지방정부에 리동휘,김립등을 체포할것을 강요하였다.
리동휘는 부득불 하마탕에 있는 구춘선한테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로씨야로 들어 갔다.
1917년 리동휘는 훈춘현 대황구로 다시 나와서 량하구,김남구등에게 중일통치세력이 박약한 대황구에 반일군사학교를 세울것을 건의하였다.
1917년 리동위의 제의에 따라 량하구등은 대황구에 <북일학교>를 세운 뒤 리동휘를 명예교장으로 추대하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인재양성에 힘썼다.이어 왕청라자구 사관학교의 교직원,학생들도 북일학교로 옮겨왔다.
그후 다시 로씨야로 들어간 리동휘는 1917년4월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허나 그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만나면서 공산주의와 10월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료해하게 되였다.
1918 년2월 하바롭스크에서는 조선인혁명자회의가 열렸다.회의에서 량기탁,리동녕등은 <순전한 (광의단(光義團)>과 같은 단체를 건립하여 원동집행위원회의 후원을 받고 쏘련내전에는 개입하지 말자>고 주장하였다.이와 반대로 리동휘등은 볼쉐비크주의에 찬동하고 조선의 민족해방도 볼쉐비크들이 하는대로 하자고 주장하였다.둘은 자본주 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사상과 로선과의 모순이였다.
1918 년4월28일 리동휘등은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중앙위원회와 그 산하에 군사, 선전,조직 등 부서를 설치하고 리동휘를 위원장으로,오 와씰리를 부위원장으로,김립을 선전부장으로 그리고 알렉싼드라 김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거하였다.
허나 갓 건립된 한인사회당은 일본침략군의 지지를 받고있는 깔미꼬브가 지휘하는 백파군에 의하여 엄중한 손실을 입어 활동은 중지되고 지하로 들어갔다.
1919년2월25일 <전로한족회>의 주도밑에 림시정부형식인 <대한국민회의> 를 건립 할때 리동휘는 림시정부의 수립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구미렬강들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는 외교로선에 대하여선 반대하였다.
동년 4월 리동휘는 연변에서 무장투쟁방침을 실시하려고 훈춘,왕청,연길,동녕 등지를 순회하면서 반일무장단체의 건립,결사대의 모집과 훈련,군자모금과 무기구입 등 문제 를 지도하였다.그의 지도하에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사업을 활발 하게 전개되였다.
1919년8월 리동휘는 로씨야의 국민회와 상해림시정부간의 모순이 있음에 불구하고 <상해와 로씨야간의 모순은 작은 일이고 림시정부의 운행은 대사>라고 하면서 림시 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할것을 결심하고 상해로 떠났다.
강화군 진위대장시절의 제복입은 모습(앞줄 중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진위대장에서 사임하고 교육활동에 전념 하였다.훗날 리종호의 ‘보성학교’,리준의 ‘보광학교’와 함께 한국근대교육의 삼보 (三寶)라 불리게 되는 ‘보창학교’전신인 ‘육영학교’를 설립한다.후에 ‘육영학교’는 영친 왕의 지시에 따라 ‘보창학교’로 바뀌며 보창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리동휘는 기독 교를 받아들여 ‘강화의 바울’이라고도 불리워졌다.
1907년7월 일제의 강박으로 <군대해산령>이 반포되자 강화도주민들이 봉기하자 그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여 일제에 체포되였다가 4개월후에 석방되였다.
1907년에는 량기탁,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 다.그는 <한북진학회(漢北進學會)>를 건립하고 1908년1월에는 서우학회 (西友學會) 련합 하여 <서북학회>를 건립하였다.
리동휘는 대단한 연설가였다.그는 도처에서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켜 세우려면 예수 를 믿으라!예배당을 세우라!학교를 세우라!자녀들을 교육시켜라!단발하라!>면서 눈물의 호소를 드렸다.그는 카나다선교사 구례선의 보호를 받아 해금이 되여 함경남도 성진으로 옮겨가 <1교1당>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초 리동휘는 전도의 명의로 씨비리와 연변을 순회하였다. 씨비리에서는 한북 진학회시기에 반일문화계몽운동을 함께 한 리종호(李鐘浩)를 만나 반일문화운동에 대 하여 토의하였으며 연변에서는 간민교육회를 창립한 리동춘,윤해,박찬익,김립등을 만났 다.
그때 김립,윤해가 국자가의 소영자에 독립운동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듣자 리동휘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리동휘의 제의하에 학교이름도 <길동기독학당>이라고 지었다.1911년3월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였으며 초대 교장 에는 리동춘을 추대하였다.비록 리동휘는 학교설립되기전에 조선국내로 돌아갔으나 구춘선, 계봉우, 오영선등 수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길동학당으로,기택진,홍우만과 자기 딸 리희순을 명동학교 교사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1911년초 리동휘는 일제가 조작한 <신민회105인사건>으로 체포되여 판결을 받고 인천 대무이도(大無夷島)에 류배되였다.2년동안의 류배살이에서 풀려나 성진으로 돌아 온 그는 또다시 구례선선교사의 조수가 되여 기독교전도사업에 뛰여들었다.
1912년 가을 그는 갑산군 혜산진교회에서 개최한 <부흥도사경회>에 참가한 기회를 빌어 일제의 감시를 교묘히 피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왔으며 곧 명동에서 오영선,기택진,홍우만,그리고 자기 딸 희순과 상봉하였다.
그후 리동휘는 길동학당에서 김약연,김립,장기영,박찬익등과 함께 당시 북경 원세개 정부에서 <련성자치>를 공포한 기회를 빌어 부도통인 려원홍에게 간민교육회의 기초위에서 <간민자치회>를 비준할테 대하여 신청하였다.그들의 노력끝에 끝내 <간민 회>가 설립되였다.
1913년 리동휘는 로씨야에 들어가 리상설,홍범도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에 활동 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폭발되자 로씨야와 연변에 있는 반일지사들과 함께 반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고 리상설을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동년 4월 무장투쟁을 위한 인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리종호,김립등과 같이 왕청라자구 삼도하자에 있는 태흥학교를 기초로, 길동학당의 교직원들을 주축으로 연변과 기타 지방에서 모여온 청년들을 모집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때 학교 교장으로는 리동휘,교원으로는 김립, 장기영, 남공선, 김영학, 김광운, 오영 선,홍우만,김하정 등이였다.
1916년 라자구에 사관학교가 설립되였다는 소식을 탐지한 일제는 중국 지방정부에 리동휘,김립등을 체포할것을 강요하였다.
리동휘는 부득불 하마탕에 있는 구춘선한테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로씨야로 들어 갔다.
1917년 리동휘는 훈춘현 대황구로 다시 나와서 량하구,김남구등에게 중일통치세력이 박약한 대황구에 반일군사학교를 세울것을 건의하였다.
1917년 리동위의 제의에 따라 량하구등은 대황구에 <북일학교>를 세운 뒤 리동휘를 명예교장으로 추대하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인재양성에 힘썼다.이어 왕청라자구 사관학교의 교직원,학생들도 북일학교로 옮겨왔다.
그후 다시 로씨야로 들어간 리동휘는 1917년4월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허나 그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만나면서 공산주의와 10월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료해하게 되였다.
1918 년2월 하바롭스크에서는 조선인혁명자회의가 열렸다.회의에서 량기탁,리동녕등은 <순전한 (광의단(光義團)>과 같은 단체를 건립하여 원동집행위원회의 후원을 받고 쏘련내전에는 개입하지 말자>고 주장하였다.이와 반대로 리동휘등은 볼쉐비크주의에 찬동하고 조선의 민족해방도 볼쉐비크들이 하는대로 하자고 주장하였다.둘은 자본주 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사상과 로선과의 모순이였다.
1918 년4월28일 리동휘등은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중앙위원회와 그 산하에 군사, 선전,조직 등 부서를 설치하고 리동휘를 위원장으로,오 와씰리를 부위원장으로,김립을 선전부장으로 그리고 알렉싼드라 김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거하였다.
허나 갓 건립된 한인사회당은 일본침략군의 지지를 받고있는 깔미꼬브가 지휘하는 백파군에 의하여 엄중한 손실을 입어 활동은 중지되고 지하로 들어갔다.
1919년2월25일 <전로한족회>의 주도밑에 림시정부형식인 <대한국민회의> 를 건립 할때 리동휘는 림시정부의 수립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구미렬강들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는 외교로선에 대하여선 반대하였다.
동년 4월 리동휘는 연변에서 무장투쟁방침을 실시하려고 훈춘,왕청,연길,동녕 등지를 순회하면서 반일무장단체의 건립,결사대의 모집과 훈련,군자모금과 무기구입 등 문제 를 지도하였다.그의 지도하에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사업을 활발 하게 전개되였다.
1919년8월 리동휘는 로씨야의 국민회와 상해림시정부간의 모순이 있음에 불구하고 <상해와 로씨야간의 모순은 작은 일이고 림시정부의 운행은 대사>라고 하면서 림시 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할것을 결심하고 상해로 떠났다.
(두번째 줄 왼쪽으로부터 6번째 리동휘,첫째 줄 오른쪽 세번째 김구)
1920년 봄,리동휘등은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1921년 5 월 23 일 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대표대회를 소집 하고 당의 강령을 채택 하였다.이무렵 이르쿠츠에서도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이 조직되었다.전자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면 후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1920년 중엽 리승만퇴치운동을 벌인 리동휘는 소련과의 관계강화에 의한 무장투쟁 전개를 목적으로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편을 주장하고 나섰다.하여 임시정부와 소련정부사이에 소련정부의 한국독립군 양성 원조,임시정부의 공산주의 선전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공수동맹이 체결되였다.허나 리승만을 추종하는 친미외교 독립 론자들에 의해 리동휘의 주장은 거부되었고,거기에다 소련정부의 지원을 받은 40만루블의 사용문제,김립의 피살,고려공산당내부의 모순 등 많은 문제로 인하여 1921 년 5월 국무총리직을 사직하고 남경에 체류하 였다가 향항을 거쳐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상해림시정부시절의 리동휘(두번째 줄 왼쪽으로부터 열번째)
이 기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대립항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였고 끝내 <자유시참변>이 일어나 리동휘 지도하에 건립된 연변과 연해주지역의 수많은 반일 부대가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극동인민대표자회에 리동휘는 1921년11월28일 레닌을 만나 조선의 독립문제를 의논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자로서의 그의 정치적,사상적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훗날 국제공산주의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하여 고려공산당이 해체되고 통합된 ‘꼬르뷰르’(高麗國)이 설치되었으나 1924년 두개파의 갈등으로 이마저 해체되였다.
그후 리동휘는 울리지보스또크에 거주하면서 고려공산당(상해파)의 표면행동조직인 <적기단>을 파견하여 녕안과 연변 등지의 민족운동을 회복,발전시키기에 힘썼으며 20년대 중기에는 김철수,윤자영,김하구 등을 돈화에 파견하여 고려공산당 (상해파) 조직을 확대하며 남북만의 민족주의단체와도 합작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에 힘썼다.
1920년대 후기 리동휘는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국제조직인 태평양적색로동자조합
(MOPR) 련계하여 민족독립사업을 견지하다가 1935년 1월31일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2월4일 블라디보스또크 피르바 야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조선의 민족해방운동가이며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인 리동휘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였다.그의 일생은 오로지 조선의 민족독립을 위해 분투한 일생이였다.그는 중국 조선족의 반일민족투쟁에 지워버릴수 없는 업적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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