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10월26일,조선의 애국지사 안중근(安重根)은 할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의 원흉이며 제1대 일본제국주의 내각총리 대신이자 조선통감부 통감인 이토 히루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하는 세계를 놀래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중근은 1879년9월2일(음력)조선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여났다.안중근은 아명으로 안응칠(安應七)이라 불렀다.그는 어려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집안이 독실한 천주교가문이라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식민지로 되는것을 보고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가 오히려 유력자들과 천주교신부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실망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황제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으로 강제퇴위를 당한뒤 한일신협약의 체결,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그뒤 연해주로 건너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두차례 진입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로출되어 회령군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안중근은 두만강을 건너 명동에 이르러 3개월동안 김약연의 도움하에 휴식을 취하면서 명동촌 뒷산에서 사격훈련을 했다.그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신임을 잃고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8년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두차례 진입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로출되어 회령군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안중근은 두만강을 건너 명동에 이르러 3개월동안 김약연의 도움하에 휴식을 취하면서 명동촌 뒷산에서 사격훈련을 했다.그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신임을 잃고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8년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두차례 진입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로출되어 회령군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안중근은 두만강을 건너 명동에 이르러 3개월동안 김약연의 도움하에 휴식을 취하면서 명동촌 뒷산에서 사격훈련을 했다.그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신임을 잃고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초,안중근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意斷指會)를 결성한다.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으며 이때부터 수인(手印)을 찍기 시작했다.
1909년10월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할빈에 오게 되었다.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0월21일 대동공보사 기자 리강(李剛)의 도움을 받아 불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유동하와 함께 할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할빈,차가구역의 4개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할빈과 차가구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蔡家溝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할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그러나 蔡家溝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26일 오전 9시,이토 히로부미가 탄 렬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였다.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렬차안에서 회담을 가진후 9시30분경에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렬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이외에도 일곱발의 저격 총알 중,나머지 네발중 세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할빈주재 일본 총령사,만주철도 리사를 맞혔다.
저격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이등박문을 처단한 후 체포디는 의사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렬차로 옮겼으나 곧 죽었다.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제국정부에 넘겨져 려순감옥에 갇혔다.
1910년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3월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에 의해 순국되였으며 그때 나이 32세였다.그의 유해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거사에 참가했던 우덕순은 징역 3년,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도 그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리유를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미완성으로 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또한 《안응칠력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으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질뿐이다.
특히 안중근의 이러한 실천적이고 과감한 의거의 결행은 그의 독특한 '동양평화론'이라는 사상과 그의 애천(愛天),애족(愛族),애인(愛人)의 3愛정신이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念慨一去兮 必成目的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萬歲萬萬歲 大韓同胞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크게 바라봄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함이 한번 뻗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도적쥐새끼 이등(이토 히로부미)이여 그 목숨 어찌 사람목숨인고
어찌 이에 이를 줄 알았으리 도망 갈 곳 없구나
동포여 동포여 어서 빨리 큰 일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만만세! 대한동포
유묵(遺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안중근의사가 수감생활을 했던 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