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07 10:30
[광복전]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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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별의시인
 조회 : 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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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9월28일,송몽규는 당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였던 송창희(宋昌羲)와 윤영석의 큰 누이동생 윤신영(윤동주의 고모)사이에 장남으로 명동촌(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났다.
송몽규가 태여나서 얼마후인 1917년12월30일에 윤동주도 태여났다.둘의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였는지 모른다.같은해, 같은 고장에서 그것도 고종사촌간으로 련이어 태여났으니 가문의 큰 기쁨이였으리라.
송몽규가 태여났을대 가족은 우선 윤동주집에서 같이 살았다.송몽규가 다섯살될때 겨우 새로 집을 마련하고 나갔으며 송창희는 당시 명동학교 교사로 있었다.훗날 송몽규 아래로 녀 동생 한복(1923년생),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태여났다.
아래사진 다라즈(大砬子) 송창희(송몽규부친)가 살았던 옛집터
(송창희는 1948년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이주간다)
송몽규의 아명은 한범(韓範)이며 은진중학교 시절까지도 이 아명을 사용하였다.송몽규는 성격이 활달했고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했으며 항상 적극적이여서 무슨 일에서나 리더였다. 반면 윤동주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 둘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였다.
명동학교시절 송몽규,윤동주,김정우,문익환등은 한반 학생이였으며 반급은 그야말로 문학소년반이나 다름없었다.송몽규가 4학년때 이미 서울에서 《어린이》잡지를,윤동주는 《아이생활》이란 잡지를 주문해다 읽었고 그것을 동학들에게 돌려보게 하기도 하였다.5학년때 그의 주도로 윤동주등과 함께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지를 꾸렸으며 송몽규는 또 동학들을 이끌어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931년3월20일,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김정우등함께 명촌에서 10여리 떨어진 다라즈(大砬子)촌에 있는 중국인학교 화룡현립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을 다녔다.
지신진 다라즈(大砬子)중국인학교(좌측).다라즈촌 표시판(우측)
1932년 룡정은진중학교에 입학한 송몽규는 문학에 더욱 매진하였다.1935년1월에는 중학생의 신분으로 어른들과 겨루는 《동아일보》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을 송한범(宋韓範)이라는 아명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얻었다.문학소년의 기질이 넘쳐 흘렀다.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의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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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먹읍시다"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하고는 나를쏘아본다.급기야 두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볼을 흘러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생각하던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밥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까닭이다.
1934년부터 송몽규는 이미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었다.문장(文)에서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그가 얼마나 문학을 사랑했고 또 문학에 삭수가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그는 이때 벌써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해서 자신의 책들을 분류,정리하는데 썼을 정도였다.
1935년4월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제3학년을 수료하고 4학년으로 진학하지 않고 결연히 중앙군관학교(남경) 락양분교 한인반에 들어갔다.당시 중국국민당 장개석주석은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의거가 성공하자 호의를 베풀어 학교설립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였다. 이 한인반은 한국임시정부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꾸린 학교였다.
그가 이렇게 항일독립운동에 행동으로 보여준데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력사와 한문을 가르쳤던 명의조(明義朝)선생의 영향이 컸다.그는 김구와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며 송몽규를 직접 파견한 사람이기도 하였다.그는 투철한 민족의식,국가관을 갖고 있는 민족독립운동가로써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도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기도 했다.
1935년11월 송몽규는 남경을 떠나 산동성 제남에 있는 조선독립운동단체를 찾아갔다.허나 1936년4월10일,제남주재 일본령사관경찰에게 체포되여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이송되여 감금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36년9월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요시찰인'이란 딱지를 달고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가야만 하였다.
(윤동주는 광명중학교,송몽규는 대성중학교때의 시절로 추정된다)
고향에 돌아온 송몽규는 1937년4월 룡정대성중학에 4학년에 편입하여 2년남짓이 중단하였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은진중학교로 가려고 하였으나 "요시찰인"딱지가 붙어 문제학생으로 되여 학교측에서 받지 않아 어쩔수없는 선택이였다.
1938년2월,대성중학을 졸업한 송몽규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당시 연전으로의 입학은 상당히 어려웠다.헌데 간도에서 두명이 동시에 입학하다니 그것도 고종사촌간이 합격하였으니 큰 경사였다.
당시 연전에는 무궁화꽃이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태극기가 휘날렸으며 일본말을 쓰지않고 우리말로 마음껏 공부할수 있었다.그것은 정치적으로 학교소유주이자 경영자인 선교사들이 서양국적을 갖고 있었고 리념적으로는 기독교의 윤리인 자유평등을 기초로 하였기에 가능했던 현상이였다.거기에다 교수진들도 당대 저명한 조선인 학자들이였다.이런 환경과 분위기속에서 송몽규와 윤동주는 연전에서 민족정신을 키워갔으며 문학을 마음껏 배워갈수 있었다.
송몽규와 학우들은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 문우회의 잡지《문우》를 펴냈다.송몽규는 당시 문우회 문예부장이였다.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문우》지에 자기의 시 《하늘과 더불어》를 게재했다.《문우》지는 송몽규의 편집후기로 된 1941년도판을 마감으로 페간되였다.
그래도 네게서 온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1942년12월,송몽규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일본류학을 위하여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므로 별수없이 둘은 통분속에서 송몽규는 宋村夢奎(1942년2월12일),윤동주는 平沼東柱(1942년1월29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이에 윤동주는 1942년1월24일에 "참회록"이라는 시로 그때의 굴욕을 토해냈다.
1942년4월1일,송몽규는 일본인수재들도 가기 힘들다는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하였고 4월2일, 윤동주는 동경의 릿교(立敎)대학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서도 둘은 자주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도,민족문화의 말살정책등에 대하여 토론하고,비판하였다.
1943년 고향으로 돌아오려다가 송몽규는 7월10일,윤동주는 7월14일는 교토에서 특고(사상 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경찰의 특수조직)형사에게 체포되였다.
일본 유학의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1942년8월4일)뒷줄 오른쪽,송몽규 앞줄 가운데.
1944년3월31일,교토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를 치안유지법 제5조에 걸어 '징역 2년'을 선고했고,1944년4월13일,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는 송몽규에게도 역시 치안유지법 제5조를 적용하여 '징역2년'을 선고했다.
각각 형이 확정된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꾸오까(福岡)형무소로 이송되였다.선고대라면 윤동주는 1945년11월30일까지,송몽규는 1946년4월12일까지 징역살이를 살아야했다.
둘의 판결문을 보면 둘다 일본의 멸망과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을 꾀하였다는 죄목이였다.
1945년2월16일 윤동주는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크게 한번 지르고 차디찬 감옥에서 절명했다.3월7일 송몽규도 똑같이 광복을 몇달 앞두고 그렇게도 갈망하던 자유도 누리지 못한채 불행하게 운명했다.
둘은 한줌의 재가 되여 끝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윤동주의 무덤은 동산 중앙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였고 송몽규의 무덤은 장재촌 뒷산에 묻혔다.
1945년5월20일 송몽규부친은 '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무덤앞에 세웠고,1945년6월14일 윤동주가족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1990년4월5일 연변의 유지들과 룡정1중 유기천교장등은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묘를 동산 윤동주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해사 김석관이 비문을, 동생 우규(宇奎),서규(瑞奎) 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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