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창걸
김창걸(1911-1991)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 창작활동을 벌린 조선민족의 저명한 소설가이다.
김창걸(필명 황금성.추소.강철등)은 1911년12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1917년 그가 여섯살 되던 해에 가난에 부대끼던 그의 가정은 중국 길림성 룡정현 지신 장재촌 으로 이주해왔다.김창걸은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15살 되던 해(1926년) 룡정의 예수교장로교파에서 꾸리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동안 학습하다가 1927년3월에 학교당국의 종교교육을 반대하여 일어난 동맹휴학에서 중견이 되여 단호한 투쟁을 벌린후 학우들과 같이 맑스주의의 영향이 깊이 미쳤던 대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대성중학교 재학시에 그는 혁명적조류에 휩쓸려들어갔고 지하혁명단체에 가입하여 선전고동사업을 하였다.그는 또한 진보적교원들의 지도아래 조선의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의 애독자로 되여 많은 작품을 탐독하였다.
1928년10월 그는 모진 경제난으로 학비를 댈 길이 없어서 대성중학교를 중퇴하고 부모를 도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마을의 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이때에 그는 또 명동촌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혁명청년단체에 가입하여 대중적선전활동을 맡아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돈화에 옮겨가서 지하당조직의 비밀간행물 <맑스주의>와 속보 <선봉>의 간행사업을 하였다.그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하여 조직과의 련계를 잃은 그는 마치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은 경지에 빠져 외로운 몸이 되였다.이때로부터 그는 홀몸으로 방랑생활의 길에 들어섰다.그는 동북 각지,쏘련 울라지보스또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그리고 조선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사이에 때로는 남의 논밭을 돌며 품팔이군으로 때로는 공장에서 막벌이군으로 일하면서 사회의 밑둥에 깔린 근로인민들의 생활속에 깊이 들어갔다.
1934년 명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 고장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소학교 교원,점원,사무원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문학창작에 힘썼다.
김창걸은 1936년에 처녀작 <무빈골전설>을 쓴 때로부터 자기의 창작생애를 시작하였다.그는 이때부터 1943년까지의 사이에 <암야>를 비롯한 근 30편에 달하는 단편소설과 수십편의 시,수필,평론등을 발표하였다.그후 일제놈들의 파쑈통치가 더욱 심해지고 작가들에게 어용문인으로 나설것을 강요하자 김창걸은 1943년에 이르러 단호히 붓을 꺾고 창작자유를 안아다줄 새 사회의 탄생을 고대하였다.
1936년부터 1943년에 이르는 8년동안의 창작활동에서 김창걸이 거둔 주요한 성과는 단편소설창작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나고있다.
그의 대표작들로는 《암야》(1939년),《무빈골전설》(1936년),《수난의 한토막》(1937년),《두번째 고향》(1938년),《락제》(1939년),《범의 굴》(1941년),《밀수》(1941년),《창공》
김창걸
《인간의 칠십은 고래희인데 요렇게 살려고 태여를 낳는가?…》
어쩐지 노래를 불러도 신통치 않다. 어릴 때 김참사집 머슴 영돌이가 부르던 노래는 그렇게도 신이 나기에 따라다니며 졸라서 듣군 했는데 나는 아무리 그처럼 부르려 해도 도무지 되질 않는다. 아마도 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떴기때문인가보다.
만일에 지금이라도 고분이가 바구니를 끼고 나물캐러 와서 내 노래를 들어준다면 더 신이 날는지 모르지만 봄은 이름뿐이고 아직 풀싹도 돋아나지 않았으니 벌써 나물캐러 나설리 없다.
흥, 왜 하필 이때 이 땅에 가난뱅이로 태여났는가? 스물두살 먹도록 장가도 못가는 주제에 왜 사내로 태여는 났는가? 생각하면 모두다 귀찮다.
나는 베던 나무춤도 거둘 생각이 없이 일어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지종기 쓰러지는듯한 오막살이들이 열댓집 늘어선 우리 마을에서는 최령감네 집만이 호기있게 뻗대는듯하다. 논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산골, 만주는 눈이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라더니 하도 떨어질데가 없어 십년을 앉은자리에서 산골놈이 되고마는가! 생각하면 통분한 일이지만 고분이가 사는 동네이니 나는 떠나고싶지는 않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더니 참으로 그렇긴 하다. 남풍은 분명히 남풍이련만 오장륙부가 으스스 떨리고 눈에선 매운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남의 눈을 도적하며 한가지 두가지 발등에 얹으며 베여놓은 나무춤이언만 삽시에 바람에 다 불려서 날려가고만다.
십년동안 잔뼈가 굵어진 이 마을, 날마다 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노루고개등성이, 떠나려니 갑자기 서운하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십년동안 잔뼈가 굵어진 이 마을, 날마다 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노루고개등성이, 떠나려니 갑자기 서운하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