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제1지대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1945년11월에 심양에서 조직되여 그후 홍광지대로,동북민주련군 독립제4사로,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였다.
조선족으로 구성된 이 무장대오는 «통화 2.3폭란»의 진압,남만 장백산근거지건설,토비숙청,4차의 림강보위전,료심전역 등 수많은 전투에서 국민당반동들과 토비들을 대량으로 소멸하였으며 조서족간부를 많이 양성하여 조국해방전쟁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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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령솔하에 관내로부터 나와 심양에 도착한후 1945년11월10일에 심양교외의 오가황 조선족소학교에서 제1,제3,제5 지대로 편성되였다.제1지대는 남만지구에 남게 되였다.
제1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정치위원에 방호산,참모장에 안빈,정치부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명의 병력과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졸업생,각 항일근거지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보병 9개 중대,기관포중대,경위중대 등 11개 중대를 두었다.
제1지대사령부와 독림동맹남만공작위원회는 동북국의 투쟁방침에 의하여 건군초기 부대를 확충하고 동맹건설,군중공작을 잘하여 조선족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것을 주요임무로 결정하고 무순,상성진,철령,개원,메하구,해룡,반석,연통산,통화,신빈,청언 일대에 파견하였다.그후 안동,관전,환인,집안 일대에 파견되였던 채국범,리명,김강이 령솔한 압록강지대와 영구일대에 내려간 한청의 독립대대는 선후하여 1지대에 합병되였다.
제1지대사령부는 심양 타위고지와 북릉비행장을 보위하다가 11월말에는 무순으로 옮겨가 주둔하였으며 12월20일에는 통화에 이르러 장백산 남만후방근거지를 건설하고 보위하는 중책을 맡았다.
1946년2월말까지 제1지대의 병력은 5,0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그리고 남만지구 각 현과 진에 20여개의 동맹공작의원회가 조직되고 신빈,환인,통화,류하,해룡,반석 등 조선족집거지구와 조선족촌에 분맹 혹은 소조가 조직되여 남만지구의 동맹인원수가 5,000명을 초과하였다.
제1지대는 또 남만의 광범한 조선족군중들에게 우리 당의 주장과 민족 단결,평등 정책을 널리 선전하고 그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면서 민심과 질서를 안정시키고 튼튼한 군중토대를 닦아놓아 혁명의 새 국면을 타개하였다.
제1지대가 통화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여 국민당 통화지하당 두목 손경호화 일본패잔병 잔재세력이 결탁하여 1946년2월3일 새벽4시 정각에 반혁명폭란을 일으켰다.
당시 통화시내에 있는 우군의 병력은 2개 련이였고 제1지대는 5개 중대로서 폭란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폭란이 시작되자 지대사령부전투대는 사령부보위전에서 일본인폭도 30명을 소멸하였으며 제1중대는 강남비행장에서 적 250명을 격살,포로한후 포병학교와 땅크대대를 지원하는 전투에서 적 200여명을 소멸하였다.
제5중대는 적십자병원의 적 100여명을 소멸하고 우군의 상병 50여명을 구출한후 전원공서를 보위하는 우군을 지원하여 2층까지 점령하였던 폭도 100여명을 격살하고 200여명을 생포하였다.제3,제5 중대는 이어 우체국과 전업국을 진공하던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공안국을 점령한 폭도들은 우군의 포격에 못견디여 투항하였다.
그날 오전 제1지대는 대대장 리성만(즉 리웅포)의 지휘하에 일본인 주택을 수색하여 폭란의 직접적지휘자인 원 일본관둥군 제125땅크사단 대좌 참모장 후지다 가시오를 체포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2.3»폭란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주력군이 되였다.
이전투에서 제1지대화 우군은 일본폭도 1,000여명을 격살하고 1,000여명을 생포하였으며 보총 500여자루,권총 100여자루와 대량의 비밀문건을 로획하였다.이로 하여 제1지대는 동북국과 남만지구 당정 및 우군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인민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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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지대는 동북국의 1946년2월10일부 지시에 의하여 동북민주련군 리홍광지대로 개칭되고 료녕군구에 소속되였다.리홍광의 이름으로 명명된 리홍광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왕자인(후임),정치위원에 방호산,참모장에 안민,로철용(후임),정치부주임에 주연,홍림(후임),정치부부주임에 심청(후임)이였다.
지대의 산하에는 각각 5개 중대로 구성된 4개 대대와 7개 중대로 구성된 교도대와 직속부대를 두었으며 병력은 6,000명에 달하였는데 후에 또 한개 대대가 증가되였다.
리홍광 지대는 부대정돈,군사,정치 훈련을 강화하여 부대의 자질을 높였고 사상사업을 강화하여 1946년 가을에는 대부분 중대와 기충에 당지부를 두었다.
1946년초 국민당이 안동과 통화지구를 제외한 허다한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장백산근거지는 늘 토비들의 교란을 받았다.
리홍광지대는 중공 료녕성위와 료녕군구의 지시에 따라 군중공작을 하는 한편 토비숙청과 장백산근거지전설에 전력을 다하였다.
리홍광지대는 류하,신빈,집안,통화변계의 산간지대와 통화,림강,몽강,무송변계의 밀림지대에서 토비들을 숙청하였는데 1946년 여름철과 가을철에만도 토비 500여명을 소멸하였다.기타 토비무지리는 겁에 질려 도주하여버렸기에 장박산 일대는 토비들의 교란을 받지 않게 되였으며 장백산근거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1946년5월초에 국민당이 매하구정거장을 폭격하여 허다한 손실을 빚어낸후 리홍광지대는 원 교도대의 4개 중대에 병력을 보충하여 료녕군구철도 경비대대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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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12월초 리홍광지대는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로 개편되고 여전히 료녕군구에 소속되였다.지휘부성원들로는 사장에 왕자인,정위에,방호산,부사장에 오정우(한족),제2사장에 류자의(후임,한족),참모장에 로철용,정치부주임에 홍림,정치부 부주임에 포정(한족)이였다.
제4사 산하에 3개 보병퇀과 군정학교 직속영 등을 두었는데 병력이 7,000여명이였다.
1947년초 제4사는 제1차,제2차 림강보위전에서 우군과 협동작전하여 량수하자,금천,로령 일선에서 국민당의 공격을 격퇴시켰고 운동전으로 몸강을 보위하고 주력부대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특히 로령을 침범하는 적들과 수차의 격전을 벌려 로령방어선을 사수하고 복홍툰 대장원 거점의 적 수백명을 소멸하였다.
2월말부터 제4사는 휘남전선에서 제3차림강보위전을 하였다.
휘남은 국민당 제60군 제21사의 한개 퇀과 보안부대가 공고한 방어공사를 구축하고 우세한 화력망으로 휘남을 고수하고있었다.아군은 료녕군구 사령원 장학사(한족)부사령원 겸 참모장 해방장군(한족)의 지휘하에 3월3일 오후에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제4사는 휘남동남쪽 공격임무를 맡고 제3퇀에 남산요새 주공임무를 하달하였다.
제3퇀은 남산요새 공격임무를 제1영에 맡기였는데 2차나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3월4일 아침 4시에 제1영 제3련 지뢰수 조성두는 남산요새를 폭파하여 돌격로를 열어놓고 영용히 희생되였다.
제3퇀은 조성두가 개척한 돌격로를 따라 휘남으로 밀고들어갔다.3월4일 오후 제4사는 우군과 협동작전하여 휘남을 해방하였다.제4사와 우군은 이 전투에서 적 1,000여명을 소멸하고 400여명을 포로했으며 포 17문,기관총 21정,장총과 단총 370여자루와 대량의 군용물자를 로획하였다.
휘남해방전투는 제4사가 처음으로 국민당 정예부대와 싸운 전투였다.제4사는 «2.3»폭란을 평정한후 이 전투에서 또한번 명성을 떨쳐 료녕군구의 주력부대로 되였다.
그후 제4차림강보위전이 시작되였다.제4사는 조양진과 해룡,조양진과 반석간의 심길선의 적후에 들어가 수천명 민병을 동원하여 철길을 파괴하여 장춘과 길림에서 증원해오는 국민당 2개 사의 전진을 견제하여 제4차 림강보위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47년4월3일까지 107일간 계속된 4차례 림강보위전은 류하,휘남,금천 등 현소재지를 소복하고 적 3만5,000명을 소멸하였으며 남만근거지를 공고히 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1947년5월12일부터 하기공세를 발동하였다.
제4사 제1퇀은 조양진과 반석간의 고산툰정거장을 점령한후 남하하여 조양진과 해룡을 해방하였다.제2퇀은 우군과 협동작전하여 산성진,초시,청원 등 지방을 행방하였다.
제3퇀은 우군과 협동작전하여 매하구전투에서 련화 흑산투의 적을 공격하여 기관차 한대를 로획하고 많은 적을 소멸하였으며 서안,료원 전투에서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무전기를 로회하였다.
서안전투에서 꼬마전사 주명식은 단신 36명의 적을 포로하여 휘황한 전과를 올렸다.제3퇀은 또 7월1일에 남잡목의 황금포에서 적 207사의 1개영을 전멸하였으며 영관에서 저격전을 벌려 적들의 사기를 여지없이 꺽어놓고 대량의 무기를 로획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12월5일부터 동기공세를 발동하였다.동기공세의 중요한 공격목표는 서안과 료남지구를 해방시켜 심양과 금주의적을 고립시키는것이였다.
제4사는 개원과 철령간의 중고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적을 견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947년12월23일 제4사 제1퇀은 개원에서 철령으로 이동하는 적 제53군 제116사의 한개 퇀을 습격하여 4시간의 격전에서 적 300여명을 소멸하였고 중고일대에 매복했던 제3퇀은 남하하는 적들을 기습하여 자동차 15대르 로획하고 적 170여명을 소멸하였다.12월26일 적들은 대상강보에서 숙영하던 우리 제3퇀 3영을 불의에 습격하였다.제3영은 몇시간의 현전을 거쳐 한개 패의 대가로 적 150명을 소멸하고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4사의 «3김영웅»중의 한 사람인 김상훈이 적 5명을 쏴죽이고 6명을 총창으로 찔러죽여 대공 2차를 세웠다.
그후 제4사는 개원,철령,법고 일대에서 광범한 운동전을 벌려 개원,법고,사평 해방전투에 큰 기여를 하엿다.
1947년3월15일에 아군의 동기공세가 끝났다.아군은 그번 공세에서 적 1만5,000여명을 소멸하고 료서와 료남,료북의 너른 지역을 해방하여 적을 심양,금주,장춘에 고립시켰으며 «료심전역»의 승리를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제4사는 1947년2월에 사령부를 개원현 고산툰에 앉히고 적 제53군,신6군과 대치하면서 토지개혁운동에 결부시켜 정당운동을 전개하여 장병들의 정치,군사자질을 더 한층 높이였다.
이 시기에 제4사는 심양,철령,무순지대의 광범한 농촌들에서 생산과 춧를 보위하여 이지대 농민들과 여러 민족 인민들의 열렬한 옹호를 받았다.
1948년 가을 동북해방전쟁은 최후결전의 전야에 처하였다.9월12일 료심전역의 서막이 열리자 제4사는 9월하순에 철령전선을 떠나 장춘을 향해 강행군하여 공주령 범가툰일대의 방어선을 넘겨받고 장춘의 포위된 적들의 유일한 퇴로를 막았다.
10월17일밤 적 제60군이 의거하고 10월18일에 정동국이 아군에 투항하여 국민당 10만 대군이 와해되자 장춘은 해방되였다.
장춘이 해방되자 그곳을 포위하고있던 6개 독립사들은 앞을 다추어 심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제4사 제1퇀은 10월3일 밤에 동릉고지르 점령하고 31일 오전에 마관교에서 심양방향으로 전진하던 도중 적 제53사의 한개 퇀과 조후하여 치렬한 격전끝에 놈들의 진공을 격퇴하였다.
제2,제3퇀은 30일부터 적 제53사의 방어선인 산리통툰일대로 진군하여 그 변두리의 적들을 소멸하고 제53사를 첩첩이 포위하였다.형세가 기울어진것을 감촉한 국민당 제53사 사장 허경양(한족)은 전군을 이끌고 의거하였다.제53사가 의거하자 제207사의 도의퇀도 투항하였다.
그렇게 되자 국민당의 심양동부방어선은 무너지고말았다.
동부전선을 점령한 제4사가 11월1일 북릉지구로 가서 우군과 협동작전하여 북릉지구의 국민당 제30사를 진공하자 적들은 대항도 하지 않고 투항하여 심양북부 방어선도 돌파되고말았다.
11월2일 제4사는 적의 대항을 별로 받지 않고 화평구의 중심까지 진격해 들어가 사지휘부를 지금의 료녕호텔에 정하고 제1퇀을 철서구에,제2퇀을 심해구,북릉구에,제3퇀을 화평구와 황고구에 주둔시켰다.
동북의 심장인 심양이 11월2일에 해방되엿다.1945년11월10일에 심양에서 창건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만 3년만에 탄생지로 돌아왔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료심전역은 11월2일에 막을 내렸고 전 동북은 해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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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이 해방된후 제4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여 제1퇀은 제496퇀으로,제2퇀은 제497퇀으로,제3퇀은 제498퇀으로 개칭되였다.제166사는 동북군구의 명령에 따라 심양시위수사령원 오수권(한족)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심양시의 위수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이 시기에 왕자인사장은 우군에 조동되고 독립 제2사 사장 류자의가 사장으로 임명되였다.
국민당은 도망가면서 심양 철서구에 있는 7만 5,000키로그람의 화약이 들어있는 창고와 포탄창고,심양병기공장을 폭파하려 하였으나 아군의 신속한 진공과 자기네 내부의 의견상이로 미처 손쓰지 못하였다.심양이 해방된후 놈들은 이곳을 폭파시키려고 며칠동안 폭격하였다.그리하여 심양해방후 가장 긴급한 임무는 철서의 화약창고를 보위하는것이였다.11월2일 밤부터 제496퇀은 군구의 명령대로 화약창고를 보위하는 한편 화약은 기차와 자동차로 교외의 안전제다로 날라가로 포탄은 전선으로 수송하여 심양시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였다.
제498퇀은 놈들의 폭격을 무릅쓰고 심양병기공장을 보위하였다.
제166사는 심양 각 지구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칠서공업구와 심양병기공장,심양정거장,각 비행장 등 군사기지와 공장설비를 보호하였으며 군사관제위원회르 협조하여 생산을 회복시키고 전선을 지원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당의 도시정책과 기타 위수규률을 엄격히 준수하였다.조선족으로 구성된 조선의용군 제1제대는 1만2,000명 병력을 가진 정규군사단으로 발전성장되였으며 그이름을 동북해방전쟁에서 널리 떨쳤다.
《중국조선족민족발자취총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