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9월 연길에서 최문호,김유훈의 주최하에 <교육동맹>을 결성하여 일제통치시기의 학교를 접수하고 원래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초빙하여 연길시사범학교,연길중학교,공업학교,광성중학교,고려녀자중학교와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룡정에서는 장남섭,주채와,림룡호 등의 주최하에 <교육동맹>을 조직하여 동흥,대성,영신,은진,중학교와 근화,명신녀자중학교 및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도문에서는 심인갑,강상락 등 지식인들의 주최하에 <교육조사회>를 조직하여 괴뢰만주국시기의 학교를 접수하고 중소학교를 운영하였고 조양천에서는 민주대동맹의 주최하에 <교육후원회>를 조직하여 중소학교를 운영하였다.
해방전쟁시기의 해방구와 교육은 신민주주의교육으로서 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를 위하여 복무하였으며 행방전쟁과 행방구경제건설이 수요하는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인민군중의 계급각성과 문화수준을 제고하는것을 자체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부교육은 군중교육보다 더 중요하며 성인교육은 아동교육보다 더 중요하다.>,<중등교육의 비중은 마땅히 사범교육을 제1위에 놓고 직업교육을 제2위에 놓으며 보통중학교 교육을 그다음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학교운영방침을 제기하여 여러 류형의 간부학교와 단기강습반을 많이 운영하였다.
이것은 해방전쟁,토지개혁,정권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간부를 많이 양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정책이였다. 해방전쟁시기에 물력,인력의 제한으로 정부에서는 많은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할수 없어<인민들이 동원되여 자체로 학교를 운영하며 정부에서 방조>하는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학교교육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확한 시책이였다.그리고 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의 실제적인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학제,과정 및 운영방법에서 여러가지 형식을 취하였다.연변에서는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이것은 민족언어문자사용에서의 평등을 보장하는 당의 정책이 학교교육ㅇ서의ㅣ 구현으로서 조선족의 문화교육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여주었다.
1945년11월1일 간도림시정부에서는 일제강점시기의 간도사범학교를 접수하고 개조하여 연길사범학교로 고쳤다. 1946년 8월 26일에 길림성인민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사번학교는 길림성민주학원 교육학부로 되였다가 1948년 3월 급속히 발전하는 학교교육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연변고급사범학교로 고쳐졌다.
이 학교에서는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고급사범학급과 소학교교원을 양성하는 초급사범학급이 설치되여있었다.그러다가 1949년 4월에 연변대학이 창립되면서부터 중학교 교원은 연변대학에서 양성하게 되였다.
이와 같이 연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전에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기 민족의 교원대오를 형성하였으며 1230명에 달하는 교원을 양성하였다.그중 중학교 교원이 330여명이고 소학교 교원이 900명이였다. 해방후 1년간 노력한 보람으로 학교사업이 회복되고 발전되였다.
정세의 발전은 학교사업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며 인민들의 경제부담을 줄이고 학교들에 존재하는 종파주의적경향을 극복하며 남녀공학제도를 실시할것을 요구하였다.이리하여 1946년 8월 25일에 룡정시에 있는 은진,대성,동흥,영신중학과 명신,근화녀자중학 등 6개 중학을 련합하여 길림성립룡정중학교로 개칭하였고 연길에서도 이해 9월 25일에 고려녀자중학교,연길중학교,광성중학교를 련합하여 길림성립연길제2중학교로 개칭하였으며 길림성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이 두 련합중악교에 고중을 설치하고 간부와 학교의 설비를 충실히 하는 등 조치로 교육질을 높임으로써 다른 학교들에 대하여 시범적인 역할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학교의 학생성분도 큰 변화를 일으켜 80%이상이 로동자 농민가정출신이였다.사범학교 학생과 농민간부반의 학생은 국가의 경비로 학습하게 되였다.이리하여 빈부의 차이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육불평등의 력사를 종말지었다. 해방후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노예사상,봉건사상과 전통적관념은 신민주주의교육의 발전을 엄중히 저애하였다.그리하여 당과 정부는 그들의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하고 로농병과 결합하고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도록 그들을 이끌어주고 혁명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중시하였으며 지식인정책을 참답게 관철하엿다.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정치사상교육을 적극 진행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7월까지 연변지구에서는 중학교 지도일군과 골간교원강습반을 설치하고 <신민주주의론>,<형세와 임무>,<중국근대사>,<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로해방구교육>등 모택동저작과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등을 학습하고 사상개조운동을 진행하였다. 이 사상개조운동을 통하여 교원들은 그릇된 정치인식을 바로잡고 토지개혁을 옹호하며 로농병속에 들어가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는 혁명사상과 관점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교들과 강습반에서는 토지개혁에서 집행한 고빈농로선을 그대로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교원,지도일근들을 몇개 류형으로 구분하고 심사,투쟁하는 <좌>경적인 오유를 범하였다.연길현 평안구 구정부에서는 동성용민영평안중학교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학생을 발동하여 4명의 교원을 투쟁하고 그들을 제명하였으며 80명 의 학생을 투쟁하였다.그리하여 후에는 교원이 없어 학교를 운영할수 없게 되였다.
1948년 3월 12일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민주학원에서는 교육학부의 학생 700명가운데서 35명을 투쟁하였고 그외의 37명은 투쟁한 학생들과 함께 제명하였다.연길시 제2중학교에서는 학생 348명중 32명이 퇴학당하였고 교원16명중에서는 5명이 제명되였다. 이것은 지식인을 쟁취하고 교육개조하는 당의 정책에 어긋난다.
이러한 <좌>경적인 오유를 시정하기 위하여 1948년 1월에 동북구에서는 <지식인에 대한 결정>을 지었고 뒤이어 같은 달에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중등교육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여 학교에서의 계급로선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 해방후 조선족들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와 권리를 되찾게 되였다.이에 따라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기 언어문자로 수업하는 민족교육체계를 형성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였다.
1946년 9월에 중소학교의 교과서를 편집하고 심사하는 연변교육연구회를 결성하였다.같은 해 10월 13일에 연길시 각 문학단체대표 40여명이 모여 <연길한글연구회>를 창리하였다.1946년 11월 26일에 연길시에서<연길조선문교재편집위원회>를 창립하고 리호원이 주임으로,림민호가 부주임으로 당선되고 그아래에 24명의 위원을 두었다.
1947년 3월에는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였다.이때로부터 조선문교과서를 출판할수 있게 되였다. 해방초기에 교과서는 연변 각 학교에서 자체로 편찬하다보니 통일된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토지개혁의 현정세를 중심으로 하고 계급투쟁을 반영한 글들을 많이 선택한 한글교과서가 처음으로 출판되자 각 학교에서의 그것을 통일적인 교과서로 사용하였으며 조선의 박상준이 쓴 초급중학교용 <조선어문법>을 보충교과서로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소학교의 한글,상식,산수,자연 등 교과서와 중학교의 한글교관서가 출판되였다. 이해에 50여만책의 교과서를 출판하여 남만을 제외한 전 동북 조선족 중소학교에 공급하였다. 1948년 6월 12일 길림성 교육청에서는 토지개혁후 처음으로 각현 교육과장회의를 열고 학교교육에서 문화지식과목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는 방침을 제기하였다.연변에서는 이해 6월 20일에 연변 각 중학교 교장회의를 열고 이 회의정신을 관철하였다.
같은 해 12월18일에는 연변 각 중학교 교장회의를 열고 신형의 정규화교육과 교육제도를 실시하라고 제기한 동북국 제3차 교육회의와 성교육회의의 방침을 관철한 정황을 총화하고 금후의 과업을 토의하였다. 이 시기에 연변에서는 중학교가 많이 늘어났다.공립중학교는 9개소,민영중학교는 19개소(그중 고중학급을 설립한 학교가 3개소,고중을 증설한 학교가 2개소)에 달하였고 교원은 409명,학생은 1만813명이나 되였다.
그리고 학생들의 사상의식도 뚜렷이 높아졌다.그러나 그들의 문화지식수준은 매우 낮았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학생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양을 강화하면서 문화지식전수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업을 제기하였다.학교들에서는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동북구에서 배치한 일반중학교의 각 과목이 차지하는 비례는 문화지식과목이 90%,정치과목이 10%,사범학교는 문화지식과목이 70~75%,정치과목이 10%,실무과목이 15~20%였다.
학과목의 성격과 목적에 대하여 처음으로 통일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 시기 연변에서는 조선족중학생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는것이 또 하나의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엿다.1948년 3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의 소학생은 도합 18만 7236명이였고 졸업생은 3683명이였으며 다음해에는 졸업생이 5645명으로 늘어나게 될 형편이였다.당시 연변에는 고중학생을 400명좌우밖에 모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1950년 3월에 룡정에 연변고급중학교를 건립하고 각 현중학교의 고중학급을 연변고급중학교에 귀속시키였다.한편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에서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1949년 12월에<민영중학교를 정돈할데 관한 의견>을 성정부에 제기하여 정황에 따라 공립중학교에 합병시키거나 혹은 공립으로 고치거나 혹은 취소하는 등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민영학교에 대한 방침 학교의 과정안,간부제도를 현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였다.
학교교육사업에 대한 령도제도를 통일하였다.즉 성에서는 중학교이상 학교들을 관리하였으며 현에서는 국민교육을 지도하되 완전 소학교를 잘 운영하도록 하였다. 학교의 행정조직도 통일하였다.즉 교장,교도주임,학급담임교원,교원 그리고 사무주임 혹은 사무원을 두었다. 새로운 시험제도를 세웠으며 학습성정은 100점제를 취하였다. 학생과 교원의 휴가제도도 엄하게 정하였다.학생이 3일이상 결석할 때에는 교도주임이 비준하였다. 연변에서는 1년가까운 동안 신형의 정규화교육을 실시하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각 학교들에서는 정치교양을 위주로 하다가 문화지식교육을 위주로 하였으며 이때로부터 교수를 위주로 하는 원칙을 실시하였다. 당은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에 대하여 시종일관하게 커다란 중시를 돌렸다.1946년 12월,중공길림서위 군중사업회의에서 주보중장군은 <연변조선민족문제>하는 연설에서 <간부가 일체를 결정한다.연변에 각급 민족간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앞에서는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각부문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되는 전문인재를 양성하여야 할 새로운 과업이 나섰으면 또 기초교육의 커다란 발전에 따라 고급전문이재를 양성할수 있는 기초가 이루어졌다. 1945년 9월에는 룡정시에다 룡정의과대학을 창립하였고 1945년 말에는 길동군정대학을 창설하였으며 1946년 9월에는 연길에다 길림성립민주학원을 건립하였고 1948년 4월 2일에는 연변정치간부학교가 건립되였다.
그리고 1949년 3월 20일에는 연길에다 우리 나라에서 첫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을 창립하였다. 이와 같이 연변에서는 각 류형의 대학,학원,간부학교를 세우고 민족간부교육을 진행하여 해방전쟁,정권건설,경제건설,문화교육 사업에 수요되는 수많은 간부들을 양성하였다.이것은 조선족의 번영과 발전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건설로 되였던것이다.
1949년도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화룡현 동성구 보성촌 보성툰의 55호 농민들이 1년에 부담한 교육경비는 2306만 7500원(동북인민페)으로서 현물세를 제외한 총적경제부담의 53.83%를 차지하였으며 연길현 춘흥구 주평촌의 1949년 교육경비부담은 그 전해 현물세의 15%를 차지하였다.이 자료는 농민들에게 지워진 교육경비부담은 과중하였으나 교육을 발전시키려는 열의는 전례없이 높아졌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당의 교양을 받고 각성된 학생들은 용약 참군하였다.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연변에서 해방전쟁에 참가한 인수는 5만 2051명인데 그가운데서 청년학생이 4500여명에 달하였다.1946년 6월 4일에 연길시제2중학교의 131명의 남녀학생들이 참군하였으며 이 학교의 졸업반의 91명중 신체검사불합격생 1명을 제외한 90명이 전부 참군하였다.해방전쟁시기에 연변에서 전선에 나가 희생된 렬사는 2912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조선족이 90.6%로서 학생출신의 사망자가 많은 비중을 점하였다.
해방전쟁시기에 3500명의 청년학생들이 정부기관의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505명의 청년학생이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49년 4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조선족교육은 회복과 정돈,개혁과 제고의 과정을 거쳐 뚜렷한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연변의 749개 농촌마을에 13만 700여호 농가가 있었으며 평균 매개 마을에 15명의 중학생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 12호에 1명의 중학생이 있은셈이다.
연변의 80만 인구가운데서 학생이 1.4%를 차지하였다.(룡정현은 2.1%를 차지하였음.)일제강점시기에 비하면 학교는 150개소,학급은 660개 ,학생은 1만 500명,교원과 직원은 761명이 더 늘어났다.중학교는 전 성에 도합 41개소가 있었는데 연변에 26개소로서 63.4%를 차지하였다. 연변의 조선족교육이 이와 같이 뚜렷한 발전을 가져오게 된것은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한 결과이며 학교가 로동자 농민의 자녀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교육이 생산발전을 위하여 복무하고 자체로 학교를 운영하려는 인민들의 적극성이 있은 결과이다.
[출처: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