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에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1,3,5지대가 건립된후 이어 남만지구에는 조선의용군 압록강지대가 건립되였다.지대장에 채국범(김호),정위에 리명,정치주임에 김강이 임명되였다.채국범은 진찰기의용군 대장이고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협히원이였으며 리명은 산동의용군 책임자였다.
압록강지대는 산동에서 동북으로 진군한 의용군을 위주로 하여 조직되였다.압록강지대는 안동,관전,환인,집안 등 압록강연안ㅇ으로 진출하여 조선족군중사업을 하였으며 부대를 확대하였다.
압록강지대의 한개 소부대가 륙도하자에 이르자 각 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그중 청년들이 제일 열성적이였다.그날저녁 청년들이 소학교 교실에 모이자 의용군중대 지도원 무정이 연설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항전이 끝난 지금 조선사람들은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압박과 착취가 없는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 다음 《피끊는 청년들은 손에 총을 들고 근로인민들의 리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그러자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참군하였다.
그후 청년좌담회를 열고 무정이 《조선독립동맹》에 대해 소개하였다.그는 나에게 독립동맹에 가입할 등기표 한장을 주면서 쓰라고 하였다.나는 1946년 1월에 압록강지대에 참가하였다.
환인현에서는 많은 청년들이 조선의용군 압록강지대에 참가하였다.이리하여 환인중대가 건립되였다.우리들은 정치군사훈련을 받았으며 혁명가요를 배웠다.그리고 현소재지의 경계임무도 담당하여 밤이면 한개 분대씩 동산포대에 올라가서 토비들의 소란을 방비하였다.
압록강지대는 관전,안동,집안 일대에서도 군대모집을 하였다.
해방전에 지하당조직이 활동하였던 집안에는 해방직후 제일먼저 인민정권이 성립되였다.이곳에서 산동항일근거지에서 온 송춘석이 군대모집과 건맹사업을 지도하여 1946년 1월에는 200여명으로 증가되여 두개 중대를 편성하였다.
1946년 1월말 어느날 중대부에서 소대장 서춘석이와 나를 불러 래일아침 떠나 지대의 명령을 집안현에 주둔하고있는 송춘석에게 3일내로 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산길에는 토비들이 출몰하여 우리는 변복을 하고 떠났다.삼일만에 무사히 집안현까지 도착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의용군 압록강지대 교도원 송춘석에게 문건을 전달했다.그후에 알아본데 의하면 이 문건은 지대장 채국범,정위 리명,정치주임 김강 등은 조선으로 나가고 송춘석이 책임지고 압록강지대를 1지대에 합병시키라는 통지였다.송교도원은 문건을 본 다음에 우리를 환인ㅇ에 갈것 없이 통화1지대 정치처에 가라고 하였다.그래서 우리는 도보로 떠났다.며칠후 환인,관전,집안에 있는 부대들도 통화에 도착하였다.그때 의용군1지대를 리홍광지대로 개편하였는데 압록강지대는 각 대대에 편입되였으며 송춘석은 리홍광지대 제2대대 교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압록강지대는 1946년 11월에 건립되여 압록강연안 각 현에서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선족군중들에게 중국공산당과 의용군의 주장을 선전하였으며 안동,집안,관전,환인 일대에 독립동맹을 건립하였고 한개 대대의 병력을 확대하였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