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정계비(정계비)》란 1712년에 청나라의 강희황제가 파견한 우라(우라,즉 길림)총관 목극등(목극등)이 조선의 관원들과 함께 백두산을 답사한후 압록강과 두만강 분수령에 세운 돌비석이다.그후 이 돌비석때문에 리조와 청나라간에는 변계분쟁이 생기게 되였고 또 일제는 이 돌비석을 구실로 《간도문제》를 조작하게 되였다.
두만강과 압록강은 일찍 명나라시기와 조선의 리조시기부터 두나라의 자연변계로 되여있었다.이는 비록 현대의 국제법으로 규정한 변계선으로는 볼수 없지만 당시의 두나라간의 공문,조회서류,지도,지리지 등에도 명문으로 밝혀져있었고 두 나라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관례적으로 이 《자연변계선》을 인정해왔었다.
그런데 1640년이후 청군이 관내로 진출하고 또 1677년경 청나라가 장백산이북의 1,000여리를 《봉금구역》으로 설정한후 두만강,압록강 상류구간이 인연이 끊어진 봉금지대로 되였으나 이따금씩 삼을 캐거나 수렵하며 벌목을 하는 조선인들의 범월사건이 생기기고 하였고 조선 빈궁민들이 범월이주하여 거주하기도 하였다.
18세기초 조선인들의 범월은 더욱 빈번해져서 량강상류는 이른바 《범월인들의 소굴》로 되였다.게다가 청나라 관군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되여 두 나라간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였다.례컨대 조선 숙종왕 11년(1685년),청나라의 주방협령(주방협령)륵초(륵초 또는 륵초)등이 청나라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압록강안 삼도구(삼도구)일대에서 변계지도를 작성하다가 조선인이 발사한 총알에 맞아 부상당하였다.이에 강희황제가 조선에 문책한 결과 조선에서는 범인이 사사로이 강을 건너가서 총질하고는 도망쳤다고 하였으나 기실은 조선에서 범인을 처형하고 지방관까지 엄벌하였던것이다.1710년 11월 조선의 평안도위원군에 사는 리만기(리만기)등 9명이 밤에 월강하여 산삼을 캐는 청나라 사람 5명을 죽이고 삼과 기타 물건을 로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 청나라의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청일통지)》를 편찬하여 청나라의 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그런데 청나라와 조선간의 변계는 두만강,압록강이라는것은 일찍부터 명확하나 두 강의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데다 인연이 없어서 똑똑하지 못했다.게다가 변계사건이 바로 두 강 상류에서 발생하군 하므로 강희황제는 1691년 두 나라의 변계를 재확인하려고 흠차대신에게 자문(자문)을 주어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그대요는 다음과 같다.《지금 청일통지를 편찬하는데 기재해야 할 성지(성지),산하(산하),성경(성경),녕고탑(녕고탑)등은 이미 기록된 책들에 오유들이 많다.이것은 청나라의 발상지와 관계되는 큰 문제이다.그래서 대신을 파견하여 이미 기록된 책과 실제를 대조하며 확인하겠으니 압록강부터 토문강(즉 두만강)에 이르는 남안일대는 조선의 역참에 관계되기에 조선에서는 미리 준비하여 대신이 가게 되면 길을 아는 안내인을 선발하여 함께 답사하기 바란다.》이에 조선에서는 동지(동지)김익한(김익한)을 북경에 파견하여 혜산(혜산)지구는 산세가 험악하고 길도 험하니 다른 곳을 택할것이고 두 강 상류는 황막하여 역참도 없고 길을 아는 사람도 찾기 어렵기에 대신도 고생할것이라느것과 특히 《두만강지방은 험조하고 길이 기구하기에 조선으로부터 가는것이 좋겠다.》고 상언하였다.결과 그번 답사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이후인 1710년 상술한 리만기사건이 발생되자 강희황제는 이를 계기로 두 강 상류의 경계를 확정할것을 결정하고 이를 계기로 두 강 상류의 경계를 확정할것을 결정하고 능력있는 성경 장경(장경,청나라의 관제 부도통에 해당.)1명을 봉황성(봉황성)에 파견하여 조선관원을 만나《살인사건》의 발생지점이 청나라 국계내인가 아니면 조선국계내인가를 조사하여 밝히라고 지시하였고 이어서 우라총관 목극등(목극등),병부랑중(병부랑중)상태(상태),례부주사(례부주사)하순성(하순성),성경 례부시랑 조이득(조이득),부도통 탁류(탁류)등을 파견하여 조사하여 밝히라고 하였다.이듬해인 1711년 조선의 숙종왕은 근신을 파견하여 지방관과 함께 죄인을 규명하였으나 청나라 관원들이 봉황성으로 온다는것을 알고 형조참의(형조참의)송정명(송정명)을 봉황성에 파견하겠다는것을 알리기 위해 사역원(사역원정)김경문(김경문)을 북경에 파견하였다.그때 열하에 가있던 강희황제는 《조선관원이 봉황성에 가서 기다릴것》이라고 하면서 례부원외랑(례부원외랑)인 편두(편두)를 봉황성에 파견하여 목극등을 만나서 상의하라고 지시하였다.편두가 김경문과 함께 봉황성으로 가니 목극등은 압록강 북안으로부터,조선관원 송정명은 의주로부터 각기 위원(위원)에 이르러 살인지점을 돌아본 다음 송정명에게 자문을 보내고 자기는 압록강을 거술러 올라가서 림토(림토)에 도착하였다.이때 조선에서는 참판 유진일(유진일)을 파견하였다.이에 목극등은 봉황성에 돌아와서 기타 관원들을 그곳에 머무르레 하고 자기자신이 강희황제가 있는 열하 승덕으로 가서 보고하였고 압록강,두만강 상류를 답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711년 강희황제는 내각대학사 등에게 지시문을 내렸는데 지시문에서 그는 압록강,두만강 상류의 답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혼돈강(혼돈강),즉 송화강)은 장백산뒤로부터 류출하여 선창(선창),타성우라(즉 지금의 길림)로부터 동북쪽으로 흘러 흑룡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이는 모두 중국경역에 속한다.압록강은 장백산으로부터 동남으로 흐르다가 서남으로 봉황성과 의주(의주)사이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압록강 서북지구는 중국경역이고 강 동남은 조선경역에 속하므로 강을 국계로 한다.도문강은 장백산의 동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도문강 서남은 조선경역에 속하고 강 동북은 중국경역에 속한다.역시 강을 국계로 한다.이 점은 이미 명백한바이다.그러나 압록강,두만강 두 강 상류사이의 지구는 아직도 불명확하다.그러므로 부원 2명을 파견하여 봉황성에 가서 리만기사건을 조사하며,타성우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하여 량강상류지방을 답사할것인즉 조선관원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것이다.가령 중국경역내로 하여 거더라도 조선관원과 함께 갈것이요 혹시 중국경역이 험준하여 길이 막히면(극진처,즉 두강의 강원)까지 가서 상세히 답사하여 변계를 확인한후 보고하라.
1711년 목극등등은 강희황제의 성지를 받들고 봉황성으로부터 장백산에 이르는 변계를 답사하러 떠나려 하였으나 회도(회도)를 보니 길은 멀고 강물은 크기에 떠나지 못했다.이에 강희황제는 《래춘(1712년)얼음이 녹으면 의주로부터 작은 쪽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갈수 없는데는 륙로로 도문강쪽을 답사할것,그러나 길이 멀기에 도중에서 길이 막히면 조선인더러 물자를 공급하게 하라.이런 상황을 파견되여온 조선관원들에게 알리는 한편 서류를 작성하여 조선국왕에게 보낼지어다.》고 하였다.그래서 목극등은 두만강,압록강 강원지대를 답사하여 강원을 밝히고 량국의 변계를 확인하라는 강희황제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났던것이다.
1712년2월17일 목극등은 쪽배 10척을 만들어 흥경변(흥경변)으로부터 길을 물어 두도구(두도구)로 나와 압록강을 따라 수륙으로 소행(소행)10일만에 조선 후주(후주)에 도착하여 조선의 접반사 박권(박권),리선부(리선부)등과 만났다.5월4일 그들은 혜산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량국의 조사인원들로는 다음과 같다.
청나라측은 목극등,필첩식(필첨식,즉 서기관)소이창(소이창),통역관 홍이가(홍이가),조선측은 접반사 박권(박권),함경도감사 리선부(리선부),접반군과 리의복,순시군관조대상,거산찰방 허량,박도상,통역관 김웅헌,김경문 및 짐군등이였다.
혜산에서 90여리 되는 산길을 오르니 길은 더욱 험하였다.8일에 곤장덕에 이르렀으나 박권 등은 이미 54세의 년로자로서 도보가 곤난하여 도중에서 변고라도 발생될가봐 그들더러 무산(무산)에 니려가서 기다리게 하였다.그리고는 통역관과 짐군 20명과 조선관원 6명,길안내 2명은 15일간 먹을 량식을 휴대하고 200여리를 걸어 강원을 규명하고저 그달 11일 백두산정에 올랐다.조선문헌 《만기요람(만기요람) 》에는 당시 상활이 아래와 같이 씌여져있다.
《11일 산정에 오르니 해가 서쪽에 기울어지고 있었다...정상에는큰 웅덩이와 같은 큰 늪이 있었는데 주위가 20-30리는 되는것 같았다.늪물 색갈은 검푸르고 깊이는 알수 없었다.여름이 다 되였으나 빙설이 쌓여있었고 바라보면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산모양은 멀리서 보면 흰 독을 엎어놓은듯한데 산정에 올라가보니 사위가 솟아있고 독아가리가 우로 놓인듯 한데 밖(외)은 흰색이고 안(내)은 고동색이다.사위벽은 깍아 세운듯한데 금주단병풍을 두른듯하다.》
목극등은 수원을 살펴보고나서 《북쪽으로 두개의 봉우리가 깍아지른듯 솟아있고 그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바로 송화강원지(즉 장백폭포쪽을 가리킴.-필자 주)이고 산마루에서 약 3-4리를 천천히 내려가니 압록강원지가 있었다》고 하였다.
목극등은 송화강과 압록강 수원을 비교적 정확히 지적하였다.그다음 그는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원류를 찾기 시작했다.산아래서 동으로 흐르는 시내물을 발견한 그는 김경문 등에게《이곳을 분수령이라고 할수 있는데 여기에 <정계비>를 세우는게 어떠하냐.》고 물었다.
김경문 등도 찬동했다.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이 땅속으로 흐르는고로 강계가 불명확하니 비석을 경솔히 세울수 없다.》고 하면서 김애순,김웅헌,조대상 등에게 동으로 흐르는 강물을 찾아 동류(동류)여부를 알아보게 하였다.명령을 받은 그들은 60리를 답사하고 저녁켠에야 돌아와서 《물이 관연 동으로 흐른다.》고 여쭈었다.
목극등은 인차 사람을 시켜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비문은 횡서(횡서)로 《대청(대청)》이라고 새기고 종서(종서)로 《우라총관 목극등이 어명을 받들고 변계를 답사하면서 이곳을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동쪽은 토문(토문)이니 분수령에 돌을 깍아 기록하노라.강희 51년5월15일,필첩식 소이창,통관 홍이가,조선군관 리의복,조대상,차사관 허량,박도상,통관 김웅헌,김경문》이라고 새겼다.이것이 곧 력사상에서 말하는 《정계비》이다.
5월28일 목극등일행은 무산에 돌아와서 조선접반사 박권등을 만났고 그후에 각기 자국정부에 답사한 경과와 두만강상류변계에 비석을 세웠다는것을 보고하였다.
장백산《정계비》가 세워진후 청나라와 조선의 변무는 한단락 종말을 고했다.그후 두 나라에서는 두만강,압록강을 계선으로 량국의 변계를 수호하였으며 1714년 청나라에서는 훈춘협령을 설치하고 변경지구의 순찰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 《정계비》가 세워진지 171년이 지난후인 1883년에 말썽을 일으킬줄이야 누가 알았으랴!연변에 월경이주한 조선족간민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간에 분쟁이 생기게 되자 두 나라의 변계선문제가 다시 제기되였다.청나라에서는 량국의 변계는 여전히 두만강,압록강이라고 주장하고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는 두만강강원에 세워진것이 아니라 《흙무덤》에 세워져있기에 정계비의 비문의 《토문(토문)》은 두만강이 아니고 다른 강이라는 이설을 내놓고 《정계비》의 위치에 기준하여 국계를 재확정하자고 주장하였다.즉 량국의 변계확정에서 청나라는 두만강,압록강을 기준하자고 주장했고 조선에서는 정계비의 위치를 기준하자고 주장하였다.이번 변계문제는 나중에 일제가 연변을 침략하는 구실로 되여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70여년이후에 발견된 정계비의 위치가 두만강 강원에 있지않고 송화강원류인 이도강 강원 웃쪽 《흙무덤이 문같이 생긴 곳》에 세워져있었겠는가?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이다.아무튼 중국측은 후세사람들이 정계비를 옮겨놓았다고 주장하였다.그것은 강희황제의 지시를 받은 목극등이 압록강,두만강의 《극진처》,즉 두강의 강원을 찾아 정계비를 세웠기때문인것이다.송화강연안의 우라총관인 목극등이 두만강이 두나라의 변계라는것을 몰라서 송화강원류인 《흙무덤》에《정계비》를 세울수는 없었던것이다.그리고 목극등등은 비록 두만강,압록강의 강원을 밝히고 두나라의 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답사하고 또 정계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과학적인 측량수단이 결여된 당시의 상활에서 목측이나 도보측량으로 그렇게 복잡하고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두만강수원을 정확히 찾아 낸다는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특히 두만강수원을 줄곧 바위밑으로 흐르므로 수원을 찾기가 더욱 어려웠을것이다.백두산에서 두만강 수원이 명확한 무산까지 280리인데 겨우 60리 정도 동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살펴보고(실제로 흙무덤아래의 이도강은 동으로 좀더 흐르다가 북으로 굽이돌아 이도핵하에 흘러든다.)그것을 두만강 원류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후의 정계비위치에 관해 문제가 있었으나 목극등등이 압록강,두만강의 강원을 찾아서 비석을 세운것만은 사실이며 또 정계비에 새겨져있는 《서쪽은 압록,동쪽은 토문》이라고 한것도 명학한것이다.그러므로 두 나라의 변계는 비문에 따라 두만강,압록강을 계선으로 하는것이 마땅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