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07 14:22
[광복전] 명암촌의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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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별의시인
 조회 : 8,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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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이 부락으로 형성되기는 80여년전이였다.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였다.바로 이때에 20여호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와 정착하여 오늘의 명암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명암촌에 이주한 량씨는 원래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지금의 김책시)학성면 달래동에서 살았다.달래동은 원래 토지가 척박한 산간마을인데 10년에 9년은 흉년이 들어 온 마을 80여호가 모두 째지게 가난하였다.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살림이 더욱 가난해지자 마을사람들은 중국에 이주할 문제를 의논하였다.의논끝에 량태윤 등 2명을 먼저 파견하여 적합한 이주지를 선택하게 하였는데 량태윤 등이 연변지방을 돌아보고 선택한것이 바로 오늘의 명암촌이다.당시 이곳에는 산동에서 온 왕복이란 점산호와 소작농 몇호가 살고있었는데 왕복이 거의 모든 땅을 점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이곳은 <왕가지방>이라고 불렀다.
<왕가지방>에는 2-3호의 조선족간민이 왕복의 땅을 소작맡고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조선의 성진군에서 온 사람들이였다.그들은 이국타향에서 고향사람들을 만나자 반가와 량태윤에게 산이 좋고 물이 맑으며 토지가 비옥한 이곳으로 이주할것을 권유하였다.그래서 량태윤은 이곳을 택하게 되였다.량태윤이 달래동에 돌아가 보고 들은것을 이야기하자 며칠사이에 20여호가 이주하겠다고 나섰다.
1910년 11월말,20여호 150여명의 이민대렬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초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달래동을 떠났다.그들은 성진,길주,명천,청진,부령을 거쳐 두만강반의 회령에 도착하였다.비록 12월중순이 지났지만 두만강이 완전히 결빙하지 않아 이들은 회령에서 일주일간 기다리다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에 들어섰다.이들 일행은 삼합,룡정,투도구 등지를 거쳐 며칠후 마침내 명암촌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명암촌에 보짐을 푼후의 초미의 문제는 경작지문제를 해결하는것이였다.때마침 점산호 왕복에세 급한 사정이 생기여 이민들에게 토지를 구입할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였다.
왕복은 1904년에 산동에서 이곳에 와 많은 황지를 점하고 점산호로 되였는데 부모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꼭 돌아가야하므로 토지를 방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왕복이 헐값으로 토지를 팔고 급히 산동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귀화입적하지 않은 명암동의 량씨이주민들은 토지소유권이 없었다.당시 청정부는 조선에서 집단이주하여온 이들은 이를 민족자존심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기고 견결히 반대하였다.그들은 의논끝에 다른 조선족마을에서 성행하던 전민제를 모방하여 <호주인>을 청해서 <명예지주>로 삼았다.그들이 청하여온 호주인 한윤극은 한어를 잘하고 일정한 위신도 있었다.명암촌의 조선족이민들은 돈을 모아 한윤극의 이름으로 왕복의 토지를 사들였다.이때로부터 명암촌의 토지는 관부의 증서에는 한윤극의 명의로 기록되고있으나 실지로는 여러 사람의것이였으며 토지는 낸 돈의 다소에 따라 분여하였다.돈을 많이 낸 사람은 마을에서 가깝고 또 비옥한 땅을 분여받고 돈을 적게 낸 사람은 멀고 척박한 땅을 분여받았다.량태윤일가는 돈을 적게 내고 로력이 많았으므로 강변의 버들방천을 분배받았다.
왕복은 토지를 팔 때 집도 함께 팔았다.그에게는 정방,사랑채,창고,석마간 등이 있었는데 20여호의 이민들은 창고,석마간 등을 살림집으로 고치고 들었다.지루한 겨울을 보낸 그들은 봄이 오자 농사일을 다그치는 한편 살림집도 지었다.땅을 갈아버진고 조,콩,옥수수,연맥,보리 등을 심었다.조,보리와 옥수수는 식량으로 하고 콩은 팔아 부림짐승,식염,천 등을 샀다.
명암촌에서 수전농사를 시작한것은 그들이 이주하여 5,6년이 지난뒤의 일이다.달래동에서 한전밖에 다루어보지 못하였던 이들은 이주초기에는 수전농사를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영암촌에서 제일 처음으로 수전농사를 지은 사람은 량태윤이다.그는 땅을 살 때 돈이 적어 버들방천을 가졌지만 강을 끼고있어 관개에 편리하고 지세가 평탄하여 수전개답에 극히 유리하였다.처음에 그는 2무 남짓한 수전을 풀었는데 생각밖으로 수확이 좋았다.이듬해부터 그는 점차 수전면적을 늘이였고 이웃들도 수전을 풀기 시작하였다.1919년에 이르러 명암촌은 이미 가을이면 벼향기 그윽한 도향촌으로 되였다.
명암촌사람들은 이주초기부터 자녀교육을 몹시 중시하였다.1912년 여름 마을사람들은 총동원되여 학교를 세웠는데 학교이름을 보진(普進)이라고 하였다.제1임교장으로는 리국강,교원으로는 량환봉,유용희,김정식등이였다.교원의 생활비용은 마을사람들이 부담하였다.왕복의 땅을 살 때 따로 학전(學田)을 떼여냈는데 가장이 있는 교원은 무상으로 학전을 분여받고 자경자종(自耕自種)하여 생활하였다.이것이 교원보수의 전부이다.만약 이들이 교원을 그만두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 학전을 마을에 들여놓아야 하였다.가을이면 마을사람들이 돈을 모아 독신교원들에게 옷을 지어주었다.학전을 다루고 교원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학교의 유지비를 지불하는 면에서 집에 학생이 있거나없거나를 막론하고 전체 촌민들이 평균 부담하였다.\
건교초기에 보진학교에는 학생일 20-30명 되였다.학과목으로는 조선어,천자문,한어,산술,수신,박물,도화,체조,습자,창가 등이 있었다.보진학교의 교원들은 모두 망국의 설음을 안고 망명한 반일지사들로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보진학교의 학생들은 강한 반일의식을 갖게 되였으며 그후의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달래동에서 이주하여온 20여호는 모두 예수교의 신도들이였다.그들은 1912년에 보진학교를 창설할때 교회당도 함께 짓고 종교활동을 계속하였다.때문에 당시 주변마을사람들은 이 마을을 <예수촌>이라고 하였다.마을사람들은 이 마을명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촌명을 새로 지을것을 의논하던끝에 <장은평(藏恩坪)(하나님의 흔혜가 깃든 평지라는 뜻)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이 촌명이 그 어떤 물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예수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명암촌>이라는 촌명이 새로 생겨나 <장은평>과 함께 사용되였다.1932년에 괴뢰만주국이 선후에야 비로서 촌명이 명암촌으로 고정되였다.
명암촌사람들은 이주초기부터 일제침략자들에 대하여 남다른 적개심을 갖고있었다.무릇 반일을 위한 일이라면 부락민 전체가 발벗고 나서서 일심협력하였다.1916년 여름 투도구일본령사분관의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 2명은 사복을 하고 명암촌에 와서 민정을 조사한다는 구실을 대고 암암리에 반일운동가와 그들의 동태에 대하여 탐방하였다.분노한 마을사람들은 두놈을 강변에 끌고 가서 반주검이 되도록 때려주고 조선인 순사에게서 죽어도 다시는 일본놈의 개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그들을 놓아주었다.
예수교신도들은 매년 한번씩 <송경회(誦經會)>를가지는데 평강벌의 범위에서 진행할때에는 명암촌에 모여서 하고 연변범위에서 진행할때에는 룡정에 모여서 하였다.명암촌에서 진행하는 <송경회>는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집회로 되여 교인들을 단합시키고 그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3월13일,룡정에서 거족적인 반일시위운동이 일어나자 명암촌의 남녀로소는 보진학교의 학생들을 선두로 이도구와 투도구에 달려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3.13>운동이후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련합하여 <간도국민회>라는 반일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산하에 동,서,남,북,중 등 지방지회를 설치하였다.화룡의 안은평,고평,남구,북대지,구세동,명암 등 평강벌은 서부지회로 되였는데 본부를 명암촌에 설치하였다.한윤극이 회장으로 선거되고 량형식,량군식,리태언 등이 골간으로 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1919년 가을 간도국민회 사법부장 최익룡은 량군식의 집에서 주숙하면서 명암촌을 거점으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연변조선족인민의 반일무장투쟁이 흥기할 때 명암촌의 청장년들은 반일부대에 참가하여 일제침략군과 싸웠다.1920년 가을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반일부대가 투도구일본령사관을 습격하고 어랑촌방면으로 이동할 때 명암촌사람들은 소와 돼지를 잡아 장사들을 위로한 동시에 돈을 모아 내의를 사고 천을 사서 물감을 들여 군복을 지어 부대에 주었다.청산리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명암촌사람들은 초신을 만들어 부대에 보내주고 우차를 동원하여 부대의 물자를 운반하여주었다.
명암촌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제침략군은 청산리전투가 패배하자 명암촌에 달려들어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가옥에 불을 질렀다.그러나 명암촌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육친들의 시체를 묻고 마을을 다시 건설하고 항일의 봉화를 높이 추켜들고 일제침략자들과 계속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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