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07 14:19
[광복전] 북만 각지에로의 조선족들의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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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별의시인
 조회 : 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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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에 중동철도(中东铁道)가 부설되면서 많은 조선족 역부들이 청도부설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족이 북만 각지에 이주한 시작으로 된다.그러므로 조선족이주민들이 중동철도 연선에 집거하게 된것은 흑룡강성 조선족이주사의 특점이기도 하다.
중동철도를 동청철도(东清铁道)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청나라때에 동에 부설된 철도이기때문이다. 1896년9월8일 로씨야 주재 청나라 흠차대신 허경징은 화아도승은행(华俄道胜银行)의 설립과 동청철도의 건설,경영에 관한 계약을 체결한후 이듬해 8월부터 철도부설공사를 벌렸다. 중동철도는 할빈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수분하, 서쪽으로는 만주리, 남쪽으로는 려순에 이르렀는데 1903년6월까지 만 6년동안 부설하였다.
중동철도부설이 시작되자 조선 북부와 로씨야 로동지구로부터 수많은 조선인부들이 모여와서 철도부설공사에 참가하였다.일제의 «만주농업이민방책관계자료»에는 «1897년 중동철도부설공사에서 품팔이를 하기 위해 많은 조선사람들이 길림성으로부터 만주쪽으로 이사해왔다»고 하였다. 철도부설공사가 끝난 이후 할빈을 중심으로 동쪽의 수분하로부터 서쪽의 만주리에 이르는 철도연선에 많은 조선족마을들이 생기였는데 «횡도하자,고령자 일대에 조선사람이 10리(중국 리수로는 100리) 팔방에 집거해 살았다».
중동철도가 부설되자 흑룡강 오지에로 이주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났다.1911년10월의 «철도연선중외호적조사»에 의하면 수분하로부터 만주리에 이르는 철도연선에 거주한 조선족이 2,364명이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일부는 려관,음식점 등을 경영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만지구에로의 조선족들의 이주는 1905년 특히 1910년 «일한합병»이후부터였다.일제의 식민지략탈로 하여 파산된 농민들과 망국노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련속부절 중국 동북에 이주하여왔다.그중에는 남만일대에 이주하여왔다가 경제적,정치적 원인으로 다시 북만으로 재이주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래에서 1910년대전후 북만 각지에 이주하여 온 조선족이민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동녕과 녕고탑 지방:녕안,동녕 지방에는 일찍부터 조선족 이주민들이 로씨야나 연변일대를 경유하여 이주하여와서 동경성,고안촌,단산지와 령후 등에 조선족부락을 형성하였는데 그중에는 1905년 일한«을사보호조약》이후 망명한 조선왕조시기에 벼슬을 살던 관료,량반들도 적지 않았다.례컨대 지금 동녕현에는 1830년대 조선왕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창경자(嘉善大夫,同知中枢府事兼昌庆将)을 지내던 최태의(崔泰仪)의 분묘가 있고 그들의 후예들이 살고있다.그들도 구한말 로씨야를 거쳐 이곳으로 망명하여왔다.
1916년의 통계에 의하면 동녕현에는 3,000여명의 조선족이 ,녕안현에는 169명이 거주하고있었다고 한다.1922년 녕안현의 조선족인구는 675호, 5,100여명으로 증가되였는데 그중670호가 녕고탑,동경성,먀하(乜河),마도석(磨刀石),철령하(铁岭河)등지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당시(1922년) 녕안현소속인 해림에는 590호, 4,700여명이 거주하고있었는데 그중585호가 해림부근에서 농사를 짓고있었다고 한다.석두하자(石头河子)에 49호,302명,횡도하자(横道河子)에 8호,52명,삼도와(三道窝)에 3호,20명,참북동(站北洞)에 12호,40명이 거주하고있었다고 한다.
목릉현에는 1916년에 24명이 거주하고있었으나 1922년에는 135호,507명으로 증가되였다.그중 128호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위하현(苇河,1948년 상지현에 합병)의 일면파(一面坡)에는 15호, 40명, 주가보(周家堡)에 18호,70명,일고낭(一姑娘)에 18호,65명,마가점(马家店)에 19호, 59명,위하(苇河)에 10호,45명이 거주하고있었다.
삼강지역인 무원(抚远),요하(绕河),호림(虎林),보청(宝清)과 밀산(密山)등지에는 로씨야와 동만,남만으로부터 이주해온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다.
하이랄(海拉尔)에는 1905년좌우 로씨야에서 온 조선족역부들이 철도공사가 끝난후 남아있었는데 1911년 하이랄교외 대포창자(大铇厂子)에서 남새농사를 하다가 1916~1917년에는 개별인원들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할빈시에는 1900년 초부터 조선족들이 살고있었는데 그들은 상업,철도와 기타 업종에서 일하였다고 한다.특히 1910년 이후 일부분 반일지사들이 조선과 로씨야를 거쳐 할빈시에 들어와 활동하였다.례컨대 탁공규(卓公奎)라는 반일지사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할빈시로 이주하여와서 조선족들을 조직하여«공립회(共立会)»를 창립하였고 1910년 4월에는
«대한국민회 만주리총회»(미국에서 창립되고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급되였음.)를 창립하고 할빈 ,석두하자,횡도하자,목릉,하이랄,삼성(현재의 의란)등지에 지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당시의 할빈시 조선족인구는 미상하나(1920년초에 400여명)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상업,잡화,음식점,려관,병원,무역등 업종에 종사하고있었다.할빈시부근인 빈현,아성 등지에서도 조선족들이농사를 짓고있었다고 추측된다.1909년9월 안중근의사가 류동하(刘东夏)를데리고 할빈에 있는 류동하의 매부 김성백(金圣伯)의 집에 류숙하면서 조도선(曹道先)등과 련계하여 이등박문을 격살한 사실만 보아도 당시 할빈에는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도리(道里)에 거주하고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로씨야의 반일조직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반일운동을 진행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학강지구에는 1916~1917년경부터 조선족이주가 시작되였는데 1920년이후 수전개발이 성행되면서부터 남만과 조선에서 오는 이주민들이 증가되였다고 한다.흑룡강지구의 흑하(黑河,즉 爱珲),오운(乌云,1947년 손극현에 합병되였음.),라북(罗北)등지에는 로씨야로부터 이주하여온 조선족들이상업을 경영하였다고 한다.그중 오운현에는 1900~1910년,1915~1917년 그리고 로씨야 10월혁명 등을 계기로 수차 로씨야에서 이주하여 온 농민들이 있었는데 한때는 60여호로 증가되였고 1920년5월에는 반일인사들이 혈성단(血诚团)을 조직하고 반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농민들은 현성에서 약 250리 상거한 우르간하(乌尔干河)연안의 관황지를 구입하여 밭농사와논농사를 지었으나 비적들의 성화로 농민들의 반수가 변변히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다래누르(达来诺尔)지역에는 1910년이후 어부 한사람이 다래호(达来湖)에서 고기잡이를 하였고 그후에 어부 몇사람이 더 증가되였다고 한다.
총적으로 조선족들의 북만이주는 동만이나 동변도지구보다는 늦으나 주초기에는 주로 동녕과 녕고탑을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그후 점차 동청철도동부선을 따라 위하,주하,빈현,아성등지의 대소하천을 따라 점차 인구가 확대되여갔다.
북만 조선족들의 초기이주경로를 보면 한부분은 1890~1900년초 동청철도공사에 종사하다가 남은 로동자와 로씨야에 이주하였다가 중로변경의 각지에 재이주하였거나 철도연선 각지에 개별적으로 남아 로동에 종사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부분은 남만이고 동만에서 각종 재해 또는 생활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리재민과 빈궁민들이 료하,목단강과 그 지류를 거슬러 수전가경지를 찾아 수전을 경작한 재이주민들이였다.그러므로 북만의 조선족 이주민은 녕안,동녕 지구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적수공권의 빈궁민이였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류동성이 많았는데 한곳에서 한족지구의 황무지를 조차하여 수전을 개간하다가 수재,상재의 피해로 일년농사가 실패되면 또 살길을 찾아 대소하천을 따라 수전가경지로 이주하였다.그러므로 북만의 조선족농민들의 이주사는 피눈물의 력사이고 류랑의 력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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