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 2014년 2월 16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릿쿄(立敎)대 예배당에서 윤동주 시인 서거 69주기를 맞이해 개최한 추모 행사 모습.(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연합뉴스DB)
윤동주 조카 윤인석 교수, 규슈대서 강연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생전에 시집은 내지 못한 윤동주가 어떻게 시인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을까.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지 3주기였던 1948년 2월 16일 그의 유고시집이 첫 발간된 것이 '시인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첫 단추가 됐다.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고인의 70주기(2월 16일)를 앞둔 8일 일본 규슈(九州)대학에서 '백부 윤동주, 그리고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고인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지도록 국경을 넘어 노력한 이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고인의 시가 빛을 보기까지 우선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인 정병욱(1922-1982)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시집을 내려고 하다 시대 상황상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필로 3권의 시 묶음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1권은 자신이 지니고 다른 1권은 은사 이양하에게, 나머지 1권은 나중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에게 줬다.
윤동주가 보관한 1권과 이양하에게 전한 1권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정병욱이 받은 1권이 윤동주의 작품 세계를 전하는 소중한 자료가 됐다.
정병욱은 1943년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의 시 묶음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신과 윤동주가 독립 후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학교의 선생들을 찾아가 시집 발간을 의논하라고 당부한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시집을 넣은 항아리를 마루를 뜯고 땅에 감춰뒀다가 아들이 돌아온 후 건넸으며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1948년 빛을 봤다.
이때부터 윤동주는 시인으로서 점차 알려졌고 정병욱이 대학입시 국어 과목 문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제한 것을 계기로 청소년에게 윤동주가 더욱 알려지게 됐다. 윤동주의 시는 1970년대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됐다.
정병욱의 여동생인 정덕희는 윤동주의 동생인 윤일주(1985년 작고, 윤인석 교수의 부친)와 결혼했다.
정병욱은 이를 계기로 윤동주의 육필 시집을 윤일주 부부에게 돌려줬고 윤동주의 작품 세계와 삶을 알리려는 노력이 더욱 확산했다.
윤동주에게 관심을 두고 그를 알리려고 노력한 일본인도 있다.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출신으로 나중에 일본 국회도서관 부관장을 지낸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 씨는 한국어를 배우다 윤동주의 시를 접했으며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것을 알고 큰 관심을 두게 된다.
그는 1970년대 후반 한국을 방문해 윤일주를 만났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에 있는 윤동주의 재판 관련 기록을 찾아 보내줬다.
이 과정에서 윤동주가 독립운동을 한 것 때문에 투옥됐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윤인석 교수는 전했다.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1985년 중국 연변대학에 체류하던 중 유족의 부탁을 받고 현지에서 수소문해 결국에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냈다.
도시샤 대학의 한반도 출신 졸업생이 주축이 된 모임인 '코리아클럽'은 윤동주의 시비가 설치될 수 있도록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는 데 힘을 모았고 1995년 2월 마침내 시비가 세워졌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立敎)의 모임',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등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되새기는 활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윤 교수는 이처럼 윤동주가 알려지는 과정에서 힘을 모은 국내외 많은 이들의 노력을 생각할 때 이제 윤동주의 시가 담은 사상을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중국은 물론 더 많은 외국에서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피력했다.